맨위로가기

김만기 (조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만기는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김장생의 증손자, 김익겸의 아들이자 김만중의 형이다. 1652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고, 165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효종 때 문장력과 재주를 인정받았으며, 인경왕후의 아버지로서 영돈녕부사에 책봉되었다. 경신환국 때 훈련대장으로 활약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서석문집》이 있으며, 묘소는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인현왕후 - 민진후
    민진후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인현왕후의 오빠이자 문과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민생 안정에 힘썼으며, 소론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다가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경종 묘정에 배향되고 충문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인현왕후 - 인현왕후 (드라마)
    1988년 드라마 인현왕후는 박순애, 강석우, 전인화 등이 출연하여 인현왕후, 숙종, 장희빈을 중심으로 궁중 암투와 권력 다툼을 그린 신봉승 극본의 작품이다.
  • 조선의 부총관 - 심강
    심강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의 부마이자 명종의 외삼촌이었으며, 딸이 경원대군의 부인이 되면서 왕실과 인연을 맺고 명종 즉위 후 청릉부원군에 봉해졌으나, 권력을 이용해 재물을 축적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 조선의 부총관 - 심각
    조선 후기 문신 심각은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고, 정조 즉위 후 홍인한과 정후겸을 토죄하는 데 참여했으며, 남인 명문 가문 출신으로 윤선도, 정약용 가문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 조선의 도총관 - 심의면
    심의면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인순왕후의 방계 후손이자 심의겸의 종9대손이며, 문과 급제 후 관료 생활을 했으나 흥선대원군과의 악연으로 몰락하여 유배지에서 사망했고, 감고당 불법 개축 사건으로 탄핵을 받았다.
  • 조선의 도총관 - 어유소
    어유소는 1434년에 태어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공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건주위 정벌 중 유배되기도 했지만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성종을 호종하다 사망하여 정장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김만기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만기
한자 이름金萬基
김만기 초상
경력예조참판
출생일1633년 2월 2일
사망일1687년 3월 15일 (향년 54세)
국적조선
관직
임기1673년 ~ 1674년
임금조선 현종
직책조선의 병조판서
임기 21674년 ~ 1675년
임금 2조선 현종
조선 숙종
직책 2조선의 예조판서
학문 및 사상
분야성리학
정당서인 후예 성향 노론 세력
가족 관계
부모김익겸(부), 해평 윤씨 부인(모)
배우자서원부부인 청주 한씨
자녀김진구(장남)
김진규(차남)
인경왕후 광산 김씨(딸)
김진서(삼남)
형제김만중(아우)
친인척김춘택(친손)
김익희(이복 적출 백부)
김익훈(이복 서얼 숙부)
기타 정보
서훈보국숭록대부
웹사이트두피디아 김만기

2. 생애

김만기는 명문가 출신으로, 증조부는 영의정추증김장생, 할아버지는 김반, 아버지는 김익겸이다.[1] 어머니는 윤지의 딸 해평 윤씨이며, 동생은 김만중이다. 김익훈은 그의 이복 서숙부였고, 김집은 그의 종조부였다. 아버지 김익겸병자호란 때 순절하였고, 홀어머니와 유복자 동생 김만중과 함께 어렵게 자랐다. 훗날 그가 일찍 죽자 김만중은 어머니 해평 윤씨를 직접 봉양하기도 했다. 본관은 광산으로, 그의 집안은 서인 당원이었다. 후에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갈라지자 대체로 그의 후손들은 노론에 가담한다.

그 뒤 배다른 백부 김익희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김장생김집의 문하생인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군수를 지낸 한유량(韓有良)의 딸 한씨와 결혼하여 김진구, 김진규, 김진서, 인경왕후 등의 자녀를 두었다. 1652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653년 별시문과에 을과 3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그 뒤 장예원 주서, 승문원 주서, 시강원 설서 등을 역임하고 예조, 병조좌랑과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수찬,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657년(효종 8) 교리로 재직 중 글을 올려 오례의(五禮儀)』의 복상제(服喪制) 등 잘못된 것을 개정하기를 청하였다. 관료생활 초반 김만기는 문장력과 재주를 인정받아 효종은 "나와 더불어 일을 함께 할 자는 그 누구인가? 법도에 맞게 지적하여 인도해 줄 자는 경 등 약간의 사람뿐이다."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1659년 효종이 북벌을 준비하다가 그해 5월 갑자기 승하하자,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논란이 일자 송시열, 송준길 등의 기년설을 지지하였다. 이후 서인으로 활동하며, 3년설을 주장하는 윤선도(尹善道), 윤휴남인을 공격했다. 이후 흥문관 응교,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 등을 지냈다.

1660년(현종 4) 수찬이 되었다. 1661년 응교, 사복시정, 성균관 사성, 의정부 사인, 통정대부로 승자하여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거쳐 우부승지가 되었고 1666년(현종 8) 전라도 도사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특별히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으나 편모를 떠나 멀리 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사간원대사간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곧 우승지를 거쳐서 승정원 좌승지로 옮겼다. 1667년 예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그 후 광주부윤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1669년에는 다시 홍문관부제학을 거쳐서 이조참의가 되었다.

1671년(현종 13) 딸이 세자빈이 되면서 가선대부 예조참판으로 승진, 승문원 제조, 도총부 부총관, 관상감 제조를 겸했다가 병조참판으로 옮겼다.[1] 1672년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곧 부제학으로 전보되었다가 호조참판을 거쳐서 홍문관예문관 양관의 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에 동지의금부사를 겸임했다. 1673년 영릉(寧陵)을 옮길 때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당상관이 되었으며,[1] 1674년 7월 병조판서로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에 대하여 상소(上疏)를 올려 3년상을 주장하였다. 그 해 병조판서에 지춘추관사를 겸했다.

1674년(현종 16) 예조판서로 옮겨 정헌대부로 승진되고 이듬해(1675년)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로서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책봉되었고, 오위도총부 도총관, 호위대장, 전생서 제조를 겸했다. 이후 총융사(摠戎使)를 겸하여 병권(兵權)을 장악하였으며, 이로 인해 척신이 군사력을 손에 넣었다며 남인들의 공격과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 후 김수항 등의 천거로 대제학을 지냈으며 1680년(숙종 7) 경신대출척 때 훈련대장으로 끝까지 남인과 맞섰으며, 이후 숙부 김익훈, 숙종의 외당숙인 청성부원군 김석주와 공모하여 역모를 날조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구가 된 후 사화의 조짐이 발생했지만 그때마다 충성과 지혜를 발휘하여 국정을 편안케하고,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훈업을 이룬 뒤에는 그때그때 벼슬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니 선비들이 산악같이 우러러 보았다. 국구의 지위에 있음에도 사치하지 않고 호사를 부리지 않고 항상 검소하였으며, 예법대로 생활하였으므로 그의 스승 중 한 사람인 우암 송시열은 그를 극찬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파직되었다가 뒤에 복직되었다.[1] 1685년(숙종 11) 스승 송시열 등과 함께 증조부 사계 김장생의 미간행 저술, 시문 등을 모아 사계유고 27권(부록 3권 포함)을 간행하였다.[2]

경서, 사기 제가서에도 달통하였다. 또한 그는 법도를 따라 행하여 한 자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고, 의복 또한 예법대로 옷을 입고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다 한다. 광산 김씨의 족보를 편찬, 간행하는데 앞장섰으며 그가 간행한 족보를 서석보(瑞石譜)라 부른다.

2. 1. 초기 활동

김만기는 명문가 출신으로, 증조부는 영의정추증김장생이며, 할아버지는 김반, 아버지는 김익겸이다.[1] 어머니는 윤지의 딸 해평 윤씨이다. 동생은 김만중이다. 김익훈은 그의 이복 서숙부였고, 김집은 그의 종조부였다. 아버지 김익겸병자호란 때 순절하였고, 홀어머니와 유복자 동생 김만중과 함께 어렵게 자랐다. 훗날 그가 일찍 죽자 김만중은 어머니 해평 윤씨를 직접 봉양하기도 했다. 본관은 광산으로, 그의 집안은 서인 당원이었다. 후에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갈라지자 대체로 그의 후손들은 노론에 가담한다.

그 뒤 배다른 백부 김익희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김장생김집의 문하생인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군수를 지낸 한유량(韓有良)의 딸 한씨와 결혼하여 김진구, 김진규, 김진서, 인경왕후 등의 자녀를 두었다. 1652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2. 2. 관료 생활

1653년 별시문과에 을과 3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그 뒤 장예원 주서, 승문원 주서, 시강원 설서 등을 역임하고 예조, 병조좌랑과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수찬,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657년(효종 8) 교리(校理)로 재직 중 글을 올려 오례의(五禮儀)』의 복상제(服喪制) 등 잘못된 것을 개정하기를 청하였다. 관료생활 초반 김만기는 문장력과 재주를 인정받아 효종은 "나와 더불어 일을 함께 할 자는 그 누구인가? 법도에 맞게 지적하여 인도해 줄 자는 경 등 약간의 사람뿐이다."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1659년 효종이 북벌을 준비하다가 그해 5월 갑자기 승하하자,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논란이 일자 송시열, 송준길 등의 기년설을 지지하였다. 이후 서인으로 활동하며, 3년설을 주장하는 윤선도(尹善道), 윤휴남인을 공격했다. 이후 흥문관 응교,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 등을 지냈다.

1660년(현종 4) 수찬이 되었다. 1661년 응교, 사복시정, 성균관 사성, 의정부 사인, 통정대부로 승자하여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거쳐 우부승지가 되었고 1666년(현종 8) 전라도 도사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특별히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으나 편모를 떠나 멀리 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사간원대사간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곧 우승지를 거쳐서 승정원 좌승지로 옮겼다. 1667년 예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그 후 광주부윤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1669년에는 다시 홍문관부제학을 거쳐서 이조참의가 되었다.

2. 3. 인경왕후 입궁 이후

1671년(현종 13) 딸이 세자빈(인경왕후)이 되면서 가선대부 예조참판으로 승진, 승문원 제조, 도총부 부총관, 관상감 제조를 겸했다가 병조참판으로 옮겼다.[1] 1672년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곧 부제학으로 전보되었다가 호조참판을 거쳐서 홍문관예문관 양관의 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에 동지의금부사를 겸임했다. 1673년 영릉(寧陵)을 옮길 때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당상관이 되었으며,[1] 1674년 7월 병조판서로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에 대하여 상소(上疏)를 올려 3년상을 주장하였다. 그 해 병조판서에 지춘추관사를 겸했다.

1674년(현종 16) 예조판서로 옮겨 정헌대부로 승진되고 이듬해(1675년)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로서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책봉되었고, 오위도총부 도총관, 호위대장, 전생서 제조를 겸했다. 이후 총융사(摠戎使)를 겸하여 병권(兵權)을 장악하였으며, 이로 인해 척신이 군사력을 손에 넣었다며 남인들의 공격과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 후 김수항 등의 천거로 대제학을 지냈으며 1680년(숙종 7) 경신대출척 때 훈련대장으로 끝까지 남인과 맞섰으며, 이후 숙부 김익훈, 숙종의 외당숙인 청성부원군 김석주와 공모하여 역모를 날조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국구가 된 후 사화의 조짐이 발생했지만 그때마다 충성과 지혜를 발휘하여 국정을 편안케하고,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훈업을 이룬 뒤에는 그때그때 벼슬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니 선비들이 산악같이 우러러 보았다. 국구의 지위에 있음에도 사치하지 않고 호사를 부리지 않고 항상 검소하였으며, 예법대로 생활하였으므로 그의 스승 중 한 사람인 우암 송시열은 그를 극찬하였다.

2. 4. 생애 후반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파직되었다가 뒤에 복직되었다.[1] 1685년(숙종 11) 스승 송시열 등과 함께 증조부 사계 김장생의 미간행 저술, 시문 등을 모아 사계유고 27권(부록 3권 포함)을 간행하였다.[2]

경서, 사기 제가서에도 달통하였다. 또한 그는 법도를 따라 행하여 한 자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고, 의복 또한 예법대로 옷을 입고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다 한다. 광산 김씨의 족보를 편찬, 간행하는데 앞장섰으며 그가 간행한 족보를 서석보(瑞石譜)라 부른다. 저서로는 시문 등을 모은 《서석문집》 18권을 남겼다. 작품으로는 사육신계백 등을 배향한 충곡서원의 유허비 글씨 등이 있다.

3. 사후

사후 경기도 시흥군 대야미리(현 군포시 대야미동) 산 1-12번지에 안장되었다.

경모재(敬慕齋)에 제향되었고, 1719년(숙종 45)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비명과 신도비문은 1687년 스승인 우암 송시열이 지었고, 글씨는 김진규가 썼다.[3] 그밖에 숙종이 직접 써 준 어필비문(御筆碑)이 1699년(숙종 25)에 묘소 근처에 세워졌다. 사후 증직으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성균관 관상감사추증되었다.

1992년 6월 5일 그의 묘소와 비석, 신도비는 경기도 기념물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4. 저서


  • 서석문집 18권

5.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 - 사망
증조부김장생
종조부김집
할아버지김반
백부김익희
숙부김익훈
아버지김익겸
어머니해평 윤씨
동생김만중
제수연안 이씨 (이단상의 종형 이은상의 딸)
부인서원부부인 청주 한씨
장남김진구1651년 ~ 1704년
자부이광직의 딸
손자김춘택
손자김보택
손자김운택
손자김민택
손자김조택
손자김복택
손자김정택
손자김연택
차남김진규1658년 ~ 1716년
손자김성택
손자김양택
장녀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삼남김진서1663년 ~ ?
차녀김한혜 (정형진에게 출가)1668년 ~ ?
삼녀김복혜 ( 연안 이씨 이주신에게 출가)1673년 ~ ?
외손자이천보
외손녀심사주 ( 효종의 부마 청평도위 심익현의 손자)
사남김진부1676년 ~ ?
손자김연택 (생부: 김진구)
장인한유랑
사돈이단상


6. 기타

김만기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스승 송시열은 김만기의 증조부 김장생과 종조부 김집에게서 배웠다. 김만기는 숙부 김익희에게서도 배웠으며, 그의 아들 김진규 역시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7. 김만기를 연기한 배우

참조

[1] 웹사이트 김만기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2] 문서 사계문집에 중복 수록된 내용
[3] 문서 신도비 재건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